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우리아 왕조 (문단 편집) === 아소카 대왕 === ||[[파일:EmperorAshoka029.jpg|height=240]]||[[파일:350px-Ashoka_pillar_at_Vaishali,_Bihar,_India.jpg|height=240]]|| ||[[아소카 대왕]]의 상상화||아소카의 기둥[* 인도 [[비하르]] 주 바이샬리의 유적. 현존하는 기둥들 중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기둥이다. 사진속 기둥의 주두에는 1개의 사자만이 올라가 있지만, 3마리의 사자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의 기둥머리 장식이 더 유명하다. 인도의 국장이기도 하다.]|| 빈두사라 왕은 28년[* 25년이라는 말도 있다.] 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기원전 268년에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소카'''가 왕위에 올랐다. 아소카 왕의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역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아소카는 빈두사라의 장자가 아니었는데, 첫째 아들인 수시마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신들을 해할 것을 두려워한 재상들이 미리 수시마를 칼로 쳐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가 병환에 빠진 틈을 타 아소카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나머지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둘다 기록이 정확하지는 않으니 확실히 믿을 것은 못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소카 왕의 즉위 과정이 그다지 평화롭지는 못했다는 것. 어찌되었든 아소카는 기원전 268년에 대관을 치르고 마우리아의 3대 왕에 즉위하였으며, 그의 재위기 마우리아 왕조는 역대급 영토를 자랑하며 인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달렸다. [[먼치킨(클리셰)|먼치킨]]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아소카는 왕자 시절부터 이미 탁실라, [[마디아프라데시]] 등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격파하며 위용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뛰어난 군재는 어디가지 않았던지 아소카는 즉위 직후부터 남부의 소왕국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물량과 아소카의 탁월한 지휘가 합쳐진 마우리아 군대 앞에 대부분의 소왕국들은 가차없이 깨져나갔고, 마우리아 왕조는 얼마가지 않아 인도 최남단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 넓은 인도 대륙 전부를 정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최남단에 옹기종기 모인 [[힌두교]] 소왕국들 모두 마우리아의 패권을 인정했기에 사실상 전부를 정복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소카 왕이 한창 전쟁활동을 벌이던 기원전 265년경,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이렇게 위대한 정복활동을 펼친 아소카 왕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잔인하다'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아소카는 지옥에 내려가 고문 기술을 배워왔다'라고 수군거릴 정도로 아소카 왕의 손속은 대단히 잔인했다. 아소카 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도움을 준 공신들을 충성심을 시험한다는 이유로 몇 백여 명씩 죽여버렸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의 꽃을 땄다는 이유로 한 여인에게 500대의 채찍형을 가하는가 하면 '''아소카의 지옥'''이라는 고문용 궁전[* 이 궁전 외관에는 꽃과 대리석 등으로 장식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멋있는 궁전처럼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작 궁전 내부의 방들 안은 온갖 고문기구들과 죽어가는 포로들로 가득한 지옥이었다고.]을 만들어 각지에서 끌려온 포로들을 고문하는 심히 [[사디즘|사디스틱]]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이토록 잔인하던 아소카 왕이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니, 이유는즉슨 바로 아소카 왕이 '''불교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아소카는 재위 8년에 고대 국가인 [[칼링가 왕국]]를 침공했다. 이 전쟁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갔고, 15만 명이 마우리아로 포로로 잡혀갔다. 아소카 왕은 전투가 끝나고 적국 마을에 들어서니 피가 발목까지 들어차고, 아이들이 고아가 되어 죽은 가족들 때문에 미쳐버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불교]]로 개종한다.[* 아소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불경들마다 내용이 다르다. [[스리랑카]] 경전에는 종교적 안식을 구하던 아소카가 형식적인 힌두교나 타 종교에서 안식을 찾지 못해 불교로 향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도 많다. 어느날 아소카 왕은 자신의 형제이자 가장 강력한 왕위경쟁자였던 장자 수시마의 아들이 젊은 중으로 나타난 것을 발견한다. 젊은 중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불교 교리의 심오함에 감탄한 아소카가 불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 또 아소카의 감옥에 갇힌 수많은 종교지도자들 중 오직 한 노승만이 기적을 일으켜 유유히 빠져나온 것을 보고 아소카가 불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소카의 치세는 그가 불교로 개종하기 전과 후로 나눌 정도로 그 차이가 극명했다. 개종 이전까지 호전적이기 짝이 없던 아소카 왕은 개종한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 정복 활동을 삼갔으며, 불교 교리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전국에 스투파[* 불타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 기념물][* 가장 유명한 산치의 스투파가 이때 지어졌다.]와 사찰들이 들어섰고, 구전에 의하면 약 84,000개의 사찰들이 인도 곳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아소카 왕은 [[불교]] 교리와 그에 걸맞은 사회적, 도덕적 규범을 담은 《아소카의 칙령》을 반포했고, 인도 전역에 이 칙령의 내용을 새긴'아소카의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에는 심지어 [[동물 복지]]의 개념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4개의 다리를 가진 모든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며, 사냥이나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 역시 금했다.] '법'과 '정의'라는 뜻을 포함한 '''[[다르마]]'''를 최고의 권위로 삼고 각종 법조항들을 성문화했으며, 불교 교리에 따라 복지와 평등의 개념을 설파했다. 아소카 왕은 시민들을 위해 병원이나 약국을 지을 것을 명했고, 관리들에게 노인과 장애인들을 도우라고 시켰다. 작게는 [[망고]]나 반얀 나무를 키우는 대농장을 도로로부터 최소한 800m 이상 떨어진 곳에 지을 것 등 세세한 부분까지 법령으로 만들어 전 국민들을 교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소카 왕은 불교를 자신의 제국 안에만 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 좋은걸 외국에도 전파해야겠다 싶었던 아소카는 각종 선교사들을 [[스리랑카]], [[중국]], [[태국]], [[히말라야산맥|히말라야]], 심지어는 저멀리 [[그리스]]에까지 파견했다. 덕분에 원산지인 인도 내부에만 머무르던 불교는 이를 기점으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또 불교의 '''[[아힘사]]''' 사상을 깊이 따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와중에 비폭력, 비전쟁 법률을 제정하고 강제노동, 사냥 등을 금지시켰다. 또한 최초의 [[정신병원]], [[동물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만들고 [[수의사]] 제도를 만들어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했다. 곡식을 매우 싼 이자에 빌려주고 물이 없는 마을에 노동력을 동원해 [[우물]]을 파는 등 인프라를 확립하기도 했다. 아소카 왕은 각국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해 불교 전파와 동시에 마우리아 왕조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썼다. 특히 서쪽에 있는 그리스계 왕국들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전국에 박아놓은 '아소카의 기둥'에 새겨진 안티오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 등 헬레니즘 지역의 통치자 이름도 발견된다. 확실치는 않으나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키레네]]의 왕 마가스가 보낸 친선 사절단을 알현했다는 기록도 전해내려온다. 아소카 왕이 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대왕]]의 칭호를 붙여 보통 [[아소카 대왕]]이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